◆ 책 소개
전 힐튼 호텔 정희자 회장의 유일한 공식 자서전!
이 책은 대우 김우중 회장의 부인이 아닌 ‘정희자’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살려고 노력했던 한 여자의 일생을 담고 있다. 여자가 일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에 김우중 회장의 제안으로 서울힐튼호텔을 맡아서 ‘터프 마담’ ‘호텔의 여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성공적인 경영을 이끌었던 정희자 회장이 유일하게 쓴 공식 자서전이다.
터프 마담, 세상에 뛰어들어 자신만의 인생을 쓰다
정희자 회장의 일생은 분명 김우중 회장과의 결혼으로 바뀌었고 새로 시작됐다. 그녀는 원래 똑똑했고 야망이 있었고 그래서 유학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결혼과 함께 시어른을 모시고 시댁 식구들을 뒷바라지하고 또 매일 통금 시간이 다 되어야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생활하다가 첫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이사하고 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했다. ‘나’라는 개인의 꿈과 포부를 이룰 길 없어 괴로워하고 ‘뭔가 이루고 싶다.’ ‘뭔가가 되어야 한다.’라는 욕망을 눌러야 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1982년에 새로 짓게 된 서울힐튼호텔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일하는 여성으로 세상에 뛰어들었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냥 이름만 걸어둔 것이라느니 실권은 없을 거라느니 금방 그만둘 거라느니 말들이 많았다. 애초에 그 일을 맡겼던 남편 김우중 회장도 잠깐 하다가 그만둔다고 할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이를 악다물며 다짐했던 것을. 그녀는 ‘죽어도 그만 안 둔다. 남보다 잘한다는 소리를 꼭 듣고야 말겠다.’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 후 그녀는 본사인 힐튼호텔과 경영 계약을 불리하게 했다는 것을 알고 이의를 제기해 계약 조건을 바꾸었다. 당시로서는 계약 조건을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바꾼 것이다. 그리고 전 세계 힐튼호텔 중에서도 서울힐튼호텔을 최고의 호텔로 성장시켰다. 새벽에 직접 꽃시장에 가서 꽃을 사오고 비싼 독일제 식기류 대신 한국에서 자체 제작을 하고 침대 시트보 크기를 줄여 비용을 절감하고 전 세계 호텔들을 돌아다니며분석하고 연구하고 자문하고 해서 낸 결과이다. 그 후 그러한 공을 인정받아 중국 옌볜대우호텔과 베트남 하노이대우호텔을 건립했고 선재미술관(선재아트센터) 건립했고 골프장과 병원을 건립하는 등 앞선 선견지명과 실행력으로 여성 경제인으로서 길을 걸어 나갔다.
여성 경제인으로서의 성공과 이후 대우의 몰락과 역경을 헤쳐나가며
그녀는 호텔 경영자로서 또 대우 김우중 회장의 아내로서 전 세계의 지도자들과 만나 교류했고 또 사업을 도왔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했는데 여자인 그녀에게 역시 그랬다. 그녀는 자신만의 탁월한 친화력으로 까다로워 보이기만 한 외국 정상들과도 금방 스스럼 없는 친밀한 관계를 맺곤 했다. 가깝게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 중국의 장쩌민 주석, 베트남의 도 무어이 당서기장,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미국의 대통력을 역임한 도널트 트럼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등과 교류하고 우정을 쌓았다.
그런 그녀에게 인생 후반에 커다란 시련이 닥쳤다. 먼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선재의 죽음이 있었고 IMF 이후 대우의 몰락과 함께 그녀 자신이 일구었던 모든 자산도 함께 매각되며 역경을 겪게 됐다. 설상가상 남편인 김우중 회장은 대우의 워크아웃이 결정됨과 동시에 해외에서 5년이 넘게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녀 역시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들을 잃게 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보다 더 큰 실의에 빠진 남편의 곁을 지켰고 가족을 보살폈다. 그 후 김우중 회장의 병간호를 하고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의 심경까지가 솔직하게 씌어 있다.
◆ 저자 소개
정희자
1940년 서울 종로구 청진동 278번지에서 태어났다. 부모님과 떨어져서 유년 시절을 경주에서 외할머니와 보냈다. 경주여중고,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 유학의 꿈을 키워가던 어느 날 친구의 소개로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던 샐러리맨 청년 김우중을 만나 1964년 결혼했다. 2019년 그가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55년을 함께 살았다. 1984년 서울힐튼호텔 회장에 취임하여, 김우중의 아내가 아닌 호텔 경영인 정희자로서, 호텔이 채권단에 넘어가는 순간까지 호텔경영에 몰두했다. 경주힐튼호텔, 옌볜대우호텔, 하노이대우호텔을 건립했으며 불가리아 소피아 쉐라톤호텔, 알제리 인터내셔널 알제호텔을 인수하여 운영했다. 대우 부도 사태 때 자식처럼 키워온 서울힐튼호텔이 매각되는 고통과 사랑하는 두 남자, 남편과 큰 아들 선재를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남편 김우중과의 사이에 3남 1녀 선정, 선재, 선협, 선용을 낳았다.
1995년 숙명여대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제31회 신사임당상,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 공로패, 2012년 몽블랑 예술후원자상을 수상했다.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
서울에서 태어나 창덕여고와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교육학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대학 재학 시절 당시 남성들의 영역이었던 행정고시에 도전했고 1985년에 여성으로는 네 번째 행정고시 합격자가 됐다.
30년간 중앙부처에 재직했으며 주로 여성, 청소년, 가족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2013년에는 2001년 여성가족부가 설립된 이래 최초의 여성 차관으로 임명됐다. 현재 여성 경제인 단체인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여자의 자리 엄마의 자리』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등이 있다.
◆ 목차
책머리에 나의 어머니 정희자 (김선정)
프롤로그 당신이라는 운명을 사랑할 수밖에
1장 터프 마담, 세계로 뛰어들다
나의 분신 서울힐튼호텔
호랑이보다 무서운 터프 마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호텔
사람을 향한 열정
호텔 경영의 모든 것
취미에서 발견한 사업 비전
꿈을 확장한 현대미술관
영화와 예술을 향한 태생적 사랑
국경을 넘어선 첫 사업
호숫가에 세운 예술과 문화의 공간
큰일 뒤에 파고드는 절대 고독감
2장 나와 대우 그리고 사람들
선정이 엄마예요, 돈 좀……
상대방과 친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
서울힐튼호텔 23층 펜트하우스
남북한이 하나 된 자리
가까스로 넘긴 죽음의 고비
내가 만난 대통령들
김일성 주석에 대한 기억
거제의 아이들을 위한 학교
가족을 닮은 인연들
3장 나의 인생을 살다
다시 태어난다면 160
꿈 많은 처녀와 안경 쓴 예쁜 남자
예단으로 만든 도시락 주머니 두 개
잃어버린 구두와 보기 힘든 얼굴
멋쟁이 신여성 나의 시어머니
댓돌 밑에 숨겨둔 몽둥이
짐승 껍질로 옷을, 소가죽으로 신을
어린 나의 든든한 버팀목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세
여성의 일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 채
잘 가라 선재야!
꽃은 지고
내 삶에서 가장 잘한 일
에필로그 가족은 나의 전부 (정희자)
후기 누구의 아내가 아닌 정희자의 일생 (이복실)
◆ 본문 중에서
“김우중 회장의 부인이 아닌 내 이름 정희자로 살려고 노력한 내 삶을 나 이외에는 아무도 모를 거예요. 무슨 일을 맡게 되어도 내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p. 241
서울힐튼호텔을 시작으로 15년 동안 한국, 중국, 베트남 등에 일곱 개의 호텔을 열었다. 호텔에 대한 나의 콘셉트는 명확하다. 호텔은 효율적인 범위 내에서 ‘내 집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고 여성적인 인테리어 감각과 조명으로 고급스러움과 세련미를 제공해야 한다. 나는 호텔 경영도 내 집 살림하듯이 했다. 사물을 관찰하고 직접 행동에 옮기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성격도 한몫했다. 주방장에게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주기 위해 주방에 들어가기도 했다. 새벽에 출근해 편안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빗자루로 로비를 쓸었고 주방에 들어가 그릇들을 정리했다. 직원들이 회고하기를 “회장님이 직접 빗자루를 들고 청소 시범을 보이시고 꽃 도매상에서 꽃도 직접 골라 사 가지고 오세요.” 새벽 꽃 시장에 가서 싼값에 꽃을 구입해 꽃꽂이를 하고 식당 테이블을 장식했다. 침대 시트를 갈고 정리를 했다. 테이블 위 전화기와 메모지의 위치도 교정했다. 때론 김치도 담갔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식당의 주방장과 요리사들과 함께 새벽 4시에 수산 시장에 가서 장을 보았다. 어느 해 겨울에는 장 보러 나가다 얼음판에 미끄러진 적도 있다.
-p. 52
사실 나로서도 파티든 리셉션이든 귀빈을 모시는 것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남편의 회사가 커질수록 국가 원수나 고위급 인사의 방문이 잦아졌다. 비공식적이거나 개인적인 방문도 공식적인 방문만큼이나 의전에 신경 써야 했다. 의전은 굉장히 중요하다. 의전 하나를 잘못함으로써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고 행사가 끝난 후 귀빈의 기분이 안 좋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사업가 시절 펜트하우스에서 식사한 내빈 중의 한 분이다.
행사 규모가 점점 커지고 여러모로 신경을 써야 하는 귀빈 접대가 늘어나면서 나중에는 전문 케이터링 업체를 이용했다. 조금 큰 파티는 손님 맞을 준비를 한 달 전부터 시작해 실수가 없도록 꼼꼼히 챙겼다. 파티 참석자들을 선정하는 일부터 좌석 배치도 신경 썼다. 주빈 가까이에 누구를 배정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의도들을 따져봐야 하기에 머리 아플 때가 많았다.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공식 석상에는 빈자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초대장을 만들어서 보낸 후 참석 여부를 일일이 체크했다. 참석하는 사람 중 귀빈의 얼굴과 특이사항을 미리 직원들에게 주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칫 귀빈을 알아보지 못하고 에스코트를 소홀히 하면 심한 경우 행사 도중에 돌아가 버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좌석이 지정되어 있지 않으면 손님들이 어느 좌석에 앉을지 우왕좌왕한다.
-p. 121
“어느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세요?” 누군가 물어보면 내 대답은 바로 나온다.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모든 대통령이 훌륭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세대는 전쟁을 겪었고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컸다. 그러다 보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박 대통령은 남편과도 인연이 깊다. 시아버지가 박 대통령에겐 대구사범학교 은사였기 때문에 남편을 “우중아”라고 불렀을 정도로 아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옥포조선소 노사 분규 때 남편과 처음 만났다. 노 대통령은 남편이 노사 분규를 해결하려는 진정성을 인정해주었던 것 같다. 나도 힐튼을 경영할 때 제일 힘들었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노조가 처음 생겼을 때입니다.”라고 답한다. 당시 서울에 있는 호텔들은 모두 노조 때문에 힘들어했다. 노조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조 경험이 있는 남편이 많이 도와주어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굉장히 똑똑하고 달변가였다. 나도 부산 모임에서 몇 번 만났다. 그분이 국회의원일 때 어느 날 김해 공항에 내렸는데 누가 툭툭 쳤다. 노 대통령이었다.
-pp. 129~130
이어 아도니스 CC에서 나는 트럼프와 사위인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과 골프 라운딩을 했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주말이면 골프 클럽을 찾는 골프광으로 유명하다. 라운딩 후엔 힐튼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트럼프는 전형적인 비즈니스맨으로 보였다. 그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당시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했을 때는 안동까지 수행하기도 했다. 여왕은 고령임에도 굉장히 건강하고 품위가 있었다.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건물이었는데 여왕은 하이힐을 신고도 끄떡없었다. 남편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영국의 궁전이 크니 그 큰 궁을 걸어 다니면 체력이 저절로 길러지겠다.” 하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브루나이 국왕도 만났는데 하노이대우호텔에 있던 도자기 항아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브루나이에는 그러한 항아리를 볼 수가 없고 아주 아름다워요.”라고 칭찬했다. 국왕께 선물로 항아리를 드렸는데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는지 문뜩 궁금해진다. 당시 나는 대통령 등 국빈을 만날 때마다 작은 자개장을 제작하여 드리곤 했다. 한국 전통문화를 접한 적이 없는 분들이라 귀하고 멋지다고 모두 좋아했다.
-p. 132
“다시 김우중과 결혼하겠는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의 하나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참 난처하다. 그냥 미소만 짓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음 생에는 자상한 남편과 결혼하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면 일밖에 모르는 김우중과는 결혼을 안 할 것이다. 일에 바빠 그랬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곁도 내주지 않았다. 하루에 단 한 번만이라도 다정한 눈길을 주기를 바랐을 정도로 무심한 남편이었다. 말수가 없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곁눈조차 주지 않았을 때는 매일 출근할 직장이 있는 것이 고마울 정도였다. 건강하던 내가 갑자기 병마가 찾아와 건강이 안 좋아졌을 때도 남편은 곁에 없었다. 몸은 점점 더 아팠고 곁을 지켜줄 남편의 따뜻한 눈빛과 손길이 그리웠다. 남편도 본인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가정에 무심한 남편임을 스스로 고백했다.
“한 해에 200일이 넘는 날을 해외에서 보냈다. 거기에다가 국내에서의 잦은 지방 출장까지 계산하면 집에서 지내는 날은 더욱 줄어든다. 내 생일은 물론 아내나 아이들의 생일까지도 깜빡 잊고 넘어가기 일쑤다.”
-pp. 161~163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대한민국에 태어난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내 인생은 훨씬 평탄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지 남자를 선호하는 풍습 때문만이 아니다. 내게는 끝없이 샘솟는 강인한 힘이 있었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미로 살아가는 삶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그 무엇.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고 뭔가를 갈구하게 만드는 그 무엇. 흔히 열정이라 불리는 그 뜨거운 힘은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때론 나를 몸부림치게 했고 때론 나를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내 꿈을 펼치게끔 했다. 내 가슴에 활활 타오르던 그 불꽃 같은 힘의 근원을 생각하며 어머니가 나를 품고 있던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p. 185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자세히 보니 남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나는 회사 일로 골치가 아파서 그러려니 생각했다.
“오늘은 큰 차가 올지 몰라.”
“네?”
나는 마냥 즐겁고 설레서 더 묻지 않았다. 직원이 나왔다. 직원이 남편을 부축해서 앞장서고 내가 그 뒤를 따라갔다. 리무진이 한 대 서 있었다.
“웬일이야, 김우중 씨가?”
으레 회사 직원들의 작은 승용차를 타고 다녔는데 큰 리무진을 보니 맘이 들떴다. 차를 타고 3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남편이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마음 단단히 먹어.”
“왜?”
아들의 사고 소식에 그 역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예사롭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히스로 공항에서 만나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그리고 뉴욕에 도착하는 순간순간 남편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다. 세월이 지난 후 객관적으로 되돌아보니 당시 남편이 자신의 감정을 얼마나 극도로 억눌렀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그 일 이후로 내 남편이 보통 사람이 아닌 건지, 남자란 존재가 원래 그토록 속이 깊은 것인지 두고두고 생각하게 되었다.
-p. 211
◆ 책 소개
전 힐튼 호텔 정희자 회장의 유일한 공식 자서전!
이 책은 대우 김우중 회장의 부인이 아닌 ‘정희자’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살려고 노력했던 한 여자의 일생을 담고 있다. 여자가 일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에 김우중 회장의 제안으로 서울힐튼호텔을 맡아서 ‘터프 마담’ ‘호텔의 여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성공적인 경영을 이끌었던 정희자 회장이 유일하게 쓴 공식 자서전이다.
터프 마담, 세상에 뛰어들어 자신만의 인생을 쓰다
정희자 회장의 일생은 분명 김우중 회장과의 결혼으로 바뀌었고 새로 시작됐다. 그녀는 원래 똑똑했고 야망이 있었고 그래서 유학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결혼과 함께 시어른을 모시고 시댁 식구들을 뒷바라지하고 또 매일 통금 시간이 다 되어야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생활하다가 첫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이사하고 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했다. ‘나’라는 개인의 꿈과 포부를 이룰 길 없어 괴로워하고 ‘뭔가 이루고 싶다.’ ‘뭔가가 되어야 한다.’라는 욕망을 눌러야 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1982년에 새로 짓게 된 서울힐튼호텔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일하는 여성으로 세상에 뛰어들었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냥 이름만 걸어둔 것이라느니 실권은 없을 거라느니 금방 그만둘 거라느니 말들이 많았다. 애초에 그 일을 맡겼던 남편 김우중 회장도 잠깐 하다가 그만둔다고 할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이를 악다물며 다짐했던 것을. 그녀는 ‘죽어도 그만 안 둔다. 남보다 잘한다는 소리를 꼭 듣고야 말겠다.’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 후 그녀는 본사인 힐튼호텔과 경영 계약을 불리하게 했다는 것을 알고 이의를 제기해 계약 조건을 바꾸었다. 당시로서는 계약 조건을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바꾼 것이다. 그리고 전 세계 힐튼호텔 중에서도 서울힐튼호텔을 최고의 호텔로 성장시켰다. 새벽에 직접 꽃시장에 가서 꽃을 사오고 비싼 독일제 식기류 대신 한국에서 자체 제작을 하고 침대 시트보 크기를 줄여 비용을 절감하고 전 세계 호텔들을 돌아다니며분석하고 연구하고 자문하고 해서 낸 결과이다. 그 후 그러한 공을 인정받아 중국 옌볜대우호텔과 베트남 하노이대우호텔을 건립했고 선재미술관(선재아트센터) 건립했고 골프장과 병원을 건립하는 등 앞선 선견지명과 실행력으로 여성 경제인으로서 길을 걸어 나갔다.
여성 경제인으로서의 성공과 이후 대우의 몰락과 역경을 헤쳐나가며
그녀는 호텔 경영자로서 또 대우 김우중 회장의 아내로서 전 세계의 지도자들과 만나 교류했고 또 사업을 도왔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했는데 여자인 그녀에게 역시 그랬다. 그녀는 자신만의 탁월한 친화력으로 까다로워 보이기만 한 외국 정상들과도 금방 스스럼 없는 친밀한 관계를 맺곤 했다. 가깝게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 중국의 장쩌민 주석, 베트남의 도 무어이 당서기장,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미국의 대통력을 역임한 도널트 트럼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등과 교류하고 우정을 쌓았다.
그런 그녀에게 인생 후반에 커다란 시련이 닥쳤다. 먼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선재의 죽음이 있었고 IMF 이후 대우의 몰락과 함께 그녀 자신이 일구었던 모든 자산도 함께 매각되며 역경을 겪게 됐다. 설상가상 남편인 김우중 회장은 대우의 워크아웃이 결정됨과 동시에 해외에서 5년이 넘게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녀 역시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들을 잃게 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보다 더 큰 실의에 빠진 남편의 곁을 지켰고 가족을 보살폈다. 그 후 김우중 회장의 병간호를 하고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의 심경까지가 솔직하게 씌어 있다.
◆ 저자 소개
정희자
1940년 서울 종로구 청진동 278번지에서 태어났다. 부모님과 떨어져서 유년 시절을 경주에서 외할머니와 보냈다. 경주여중고,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 유학의 꿈을 키워가던 어느 날 친구의 소개로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던 샐러리맨 청년 김우중을 만나 1964년 결혼했다. 2019년 그가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55년을 함께 살았다. 1984년 서울힐튼호텔 회장에 취임하여, 김우중의 아내가 아닌 호텔 경영인 정희자로서, 호텔이 채권단에 넘어가는 순간까지 호텔경영에 몰두했다. 경주힐튼호텔, 옌볜대우호텔, 하노이대우호텔을 건립했으며 불가리아 소피아 쉐라톤호텔, 알제리 인터내셔널 알제호텔을 인수하여 운영했다. 대우 부도 사태 때 자식처럼 키워온 서울힐튼호텔이 매각되는 고통과 사랑하는 두 남자, 남편과 큰 아들 선재를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남편 김우중과의 사이에 3남 1녀 선정, 선재, 선협, 선용을 낳았다.
1995년 숙명여대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제31회 신사임당상,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 공로패, 2012년 몽블랑 예술후원자상을 수상했다.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
서울에서 태어나 창덕여고와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교육학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대학 재학 시절 당시 남성들의 영역이었던 행정고시에 도전했고 1985년에 여성으로는 네 번째 행정고시 합격자가 됐다.
30년간 중앙부처에 재직했으며 주로 여성, 청소년, 가족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2013년에는 2001년 여성가족부가 설립된 이래 최초의 여성 차관으로 임명됐다. 현재 여성 경제인 단체인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여자의 자리 엄마의 자리』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등이 있다.
◆ 목차
책머리에 나의 어머니 정희자 (김선정)
프롤로그 당신이라는 운명을 사랑할 수밖에
1장 터프 마담, 세계로 뛰어들다
나의 분신 서울힐튼호텔
호랑이보다 무서운 터프 마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호텔
사람을 향한 열정
호텔 경영의 모든 것
취미에서 발견한 사업 비전
꿈을 확장한 현대미술관
영화와 예술을 향한 태생적 사랑
국경을 넘어선 첫 사업
호숫가에 세운 예술과 문화의 공간
큰일 뒤에 파고드는 절대 고독감
2장 나와 대우 그리고 사람들
선정이 엄마예요, 돈 좀……
상대방과 친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
서울힐튼호텔 23층 펜트하우스
남북한이 하나 된 자리
가까스로 넘긴 죽음의 고비
내가 만난 대통령들
김일성 주석에 대한 기억
거제의 아이들을 위한 학교
가족을 닮은 인연들
3장 나의 인생을 살다
다시 태어난다면 160
꿈 많은 처녀와 안경 쓴 예쁜 남자
예단으로 만든 도시락 주머니 두 개
잃어버린 구두와 보기 힘든 얼굴
멋쟁이 신여성 나의 시어머니
댓돌 밑에 숨겨둔 몽둥이
짐승 껍질로 옷을, 소가죽으로 신을
어린 나의 든든한 버팀목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세
여성의 일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 채
잘 가라 선재야!
꽃은 지고
내 삶에서 가장 잘한 일
에필로그 가족은 나의 전부 (정희자)
후기 누구의 아내가 아닌 정희자의 일생 (이복실)
◆ 본문 중에서
“김우중 회장의 부인이 아닌 내 이름 정희자로 살려고 노력한 내 삶을 나 이외에는 아무도 모를 거예요. 무슨 일을 맡게 되어도 내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p. 241
서울힐튼호텔을 시작으로 15년 동안 한국, 중국, 베트남 등에 일곱 개의 호텔을 열었다. 호텔에 대한 나의 콘셉트는 명확하다. 호텔은 효율적인 범위 내에서 ‘내 집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고 여성적인 인테리어 감각과 조명으로 고급스러움과 세련미를 제공해야 한다. 나는 호텔 경영도 내 집 살림하듯이 했다. 사물을 관찰하고 직접 행동에 옮기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성격도 한몫했다. 주방장에게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주기 위해 주방에 들어가기도 했다. 새벽에 출근해 편안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빗자루로 로비를 쓸었고 주방에 들어가 그릇들을 정리했다. 직원들이 회고하기를 “회장님이 직접 빗자루를 들고 청소 시범을 보이시고 꽃 도매상에서 꽃도 직접 골라 사 가지고 오세요.” 새벽 꽃 시장에 가서 싼값에 꽃을 구입해 꽃꽂이를 하고 식당 테이블을 장식했다. 침대 시트를 갈고 정리를 했다. 테이블 위 전화기와 메모지의 위치도 교정했다. 때론 김치도 담갔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식당의 주방장과 요리사들과 함께 새벽 4시에 수산 시장에 가서 장을 보았다. 어느 해 겨울에는 장 보러 나가다 얼음판에 미끄러진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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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로서도 파티든 리셉션이든 귀빈을 모시는 것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남편의 회사가 커질수록 국가 원수나 고위급 인사의 방문이 잦아졌다. 비공식적이거나 개인적인 방문도 공식적인 방문만큼이나 의전에 신경 써야 했다. 의전은 굉장히 중요하다. 의전 하나를 잘못함으로써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고 행사가 끝난 후 귀빈의 기분이 안 좋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사업가 시절 펜트하우스에서 식사한 내빈 중의 한 분이다.
행사 규모가 점점 커지고 여러모로 신경을 써야 하는 귀빈 접대가 늘어나면서 나중에는 전문 케이터링 업체를 이용했다. 조금 큰 파티는 손님 맞을 준비를 한 달 전부터 시작해 실수가 없도록 꼼꼼히 챙겼다. 파티 참석자들을 선정하는 일부터 좌석 배치도 신경 썼다. 주빈 가까이에 누구를 배정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의도들을 따져봐야 하기에 머리 아플 때가 많았다.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공식 석상에는 빈자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초대장을 만들어서 보낸 후 참석 여부를 일일이 체크했다. 참석하는 사람 중 귀빈의 얼굴과 특이사항을 미리 직원들에게 주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칫 귀빈을 알아보지 못하고 에스코트를 소홀히 하면 심한 경우 행사 도중에 돌아가 버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좌석이 지정되어 있지 않으면 손님들이 어느 좌석에 앉을지 우왕좌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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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세요?” 누군가 물어보면 내 대답은 바로 나온다.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모든 대통령이 훌륭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세대는 전쟁을 겪었고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컸다. 그러다 보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박 대통령은 남편과도 인연이 깊다. 시아버지가 박 대통령에겐 대구사범학교 은사였기 때문에 남편을 “우중아”라고 불렀을 정도로 아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옥포조선소 노사 분규 때 남편과 처음 만났다. 노 대통령은 남편이 노사 분규를 해결하려는 진정성을 인정해주었던 것 같다. 나도 힐튼을 경영할 때 제일 힘들었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노조가 처음 생겼을 때입니다.”라고 답한다. 당시 서울에 있는 호텔들은 모두 노조 때문에 힘들어했다. 노조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조 경험이 있는 남편이 많이 도와주어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굉장히 똑똑하고 달변가였다. 나도 부산 모임에서 몇 번 만났다. 그분이 국회의원일 때 어느 날 김해 공항에 내렸는데 누가 툭툭 쳤다. 노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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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아도니스 CC에서 나는 트럼프와 사위인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과 골프 라운딩을 했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주말이면 골프 클럽을 찾는 골프광으로 유명하다. 라운딩 후엔 힐튼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트럼프는 전형적인 비즈니스맨으로 보였다. 그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당시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했을 때는 안동까지 수행하기도 했다. 여왕은 고령임에도 굉장히 건강하고 품위가 있었다.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건물이었는데 여왕은 하이힐을 신고도 끄떡없었다. 남편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영국의 궁전이 크니 그 큰 궁을 걸어 다니면 체력이 저절로 길러지겠다.” 하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브루나이 국왕도 만났는데 하노이대우호텔에 있던 도자기 항아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브루나이에는 그러한 항아리를 볼 수가 없고 아주 아름다워요.”라고 칭찬했다. 국왕께 선물로 항아리를 드렸는데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는지 문뜩 궁금해진다. 당시 나는 대통령 등 국빈을 만날 때마다 작은 자개장을 제작하여 드리곤 했다. 한국 전통문화를 접한 적이 없는 분들이라 귀하고 멋지다고 모두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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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김우중과 결혼하겠는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의 하나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참 난처하다. 그냥 미소만 짓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음 생에는 자상한 남편과 결혼하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면 일밖에 모르는 김우중과는 결혼을 안 할 것이다. 일에 바빠 그랬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곁도 내주지 않았다. 하루에 단 한 번만이라도 다정한 눈길을 주기를 바랐을 정도로 무심한 남편이었다. 말수가 없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곁눈조차 주지 않았을 때는 매일 출근할 직장이 있는 것이 고마울 정도였다. 건강하던 내가 갑자기 병마가 찾아와 건강이 안 좋아졌을 때도 남편은 곁에 없었다. 몸은 점점 더 아팠고 곁을 지켜줄 남편의 따뜻한 눈빛과 손길이 그리웠다. 남편도 본인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가정에 무심한 남편임을 스스로 고백했다.
“한 해에 200일이 넘는 날을 해외에서 보냈다. 거기에다가 국내에서의 잦은 지방 출장까지 계산하면 집에서 지내는 날은 더욱 줄어든다. 내 생일은 물론 아내나 아이들의 생일까지도 깜빡 잊고 넘어가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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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 태어났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대한민국에 태어난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내 인생은 훨씬 평탄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지 남자를 선호하는 풍습 때문만이 아니다. 내게는 끝없이 샘솟는 강인한 힘이 있었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미로 살아가는 삶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그 무엇.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고 뭔가를 갈구하게 만드는 그 무엇. 흔히 열정이라 불리는 그 뜨거운 힘은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때론 나를 몸부림치게 했고 때론 나를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내 꿈을 펼치게끔 했다. 내 가슴에 활활 타오르던 그 불꽃 같은 힘의 근원을 생각하며 어머니가 나를 품고 있던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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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자세히 보니 남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나는 회사 일로 골치가 아파서 그러려니 생각했다.
“오늘은 큰 차가 올지 몰라.”
“네?”
나는 마냥 즐겁고 설레서 더 묻지 않았다. 직원이 나왔다. 직원이 남편을 부축해서 앞장서고 내가 그 뒤를 따라갔다. 리무진이 한 대 서 있었다.
“웬일이야, 김우중 씨가?”
으레 회사 직원들의 작은 승용차를 타고 다녔는데 큰 리무진을 보니 맘이 들떴다. 차를 타고 3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남편이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마음 단단히 먹어.”
“왜?”
아들의 사고 소식에 그 역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예사롭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히스로 공항에서 만나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그리고 뉴욕에 도착하는 순간순간 남편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다. 세월이 지난 후 객관적으로 되돌아보니 당시 남편이 자신의 감정을 얼마나 극도로 억눌렀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그 일 이후로 내 남편이 보통 사람이 아닌 건지, 남자란 존재가 원래 그토록 속이 깊은 것인지 두고두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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